기업 사회공헌 20년, 우리는 지금 '측정'이라는 거대한 꼬리가 '기획'이라는 몸통을 흔드는 주객전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ESG 경영이 화두가 되면서 기업 사회공헌(CSR) 현장에는 '임팩트 측정'이라는 강력한 요구가 휘몰아치고 있다. 컨설팅 업체와 대기업들은 사회적 투자 수익률(SROI)이나 화폐화 수치를 들이밀며, 모든 활동을 숫자로 증명하라고 압박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엑셀 시트 안에서 춤추는 숫자가 과연 한 아이의 삶을 바꿨다고, 무너진 지역사회를 재건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1. 숫자의 함정: 측정할 수 없는 진정한 가치의 상실
사회공헌의 본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의 구조적 결핍을 채우는 데 있다. 수혜자의 자존감 회복, 공동체의 신뢰 재건, 소외된 이웃이 느끼는 정서적 안도감은 그 무엇보다 값진 성과다. 그러나 현재의 측정 시스템은 '계산하기 쉬운 데이터'에만 집착한다.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 이러한 '질적 가치'들은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거나 저평가받고 있다.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성과 지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2. 기획의 실종: 도전보다 '안전한 점수'를 택하는 실무자들
행동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보상 지표가 설정되면 그 지표를 달성하는 데 최적화된 행동을 한다. 지금의 사회공헌 실무자들은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획'에 몰두하기보다, 연말 보고서에 써넣을 '안전한 숫자'가 나오는 사업에 매몰되고 있다. 측정 점수가 낮게 나올까 봐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는 현장의 분위기는 결국 기업 사회공헌의 퇴보를 불러올 뿐이다. 반면, 사업의 취지나 과정, 결과물이 좋더라고 정성적 평가에 머물고 정량적 측정 결과나 나오지 않으면 중단될 수 밖에 없다.
3. 단기 성과주의의 폐해: 사회 변화는 '전력질주'가 아닌 '마라톤'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적 변화는 최소 5년, 10년 이상의 꾸준한 걸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임팩트 측정은 기업들로 하여금 당장 눈에 보이는 단기적 성과에만 급급하게 만든다. 깊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나무를 뽑아 뿌리 길이를 재는 격이다. 이러한 단기 성과주의는 사회공헌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현장과 수혜자보다는 보여주기식 성과에 목매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든다.
이제는 '공감의 기획'으로 회귀해야 할 때
임팩트 측정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증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업의 방향을 '개선'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머물러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식이나 정교한 계산식이 아니다. 현장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기획의 본질'이다.
기업 사회공헌의 성패는 보고서의 숫자가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와 변화된 삶의 궤적이 결정한다. 이제 우리는 측정의 기술을 내려놓고, 다시 기획의 진정성 앞에 서야 한다.
기업의 역할은 사회문제 해결이나 사회의 변화가 아니다, 그 역할을 본질적으로 해 오고 있는 비영리 전문 NGO들이 그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해주고 그 결실을 함께 나누면 된다. 앞서 나서지 마라, 또 금방 식어버리면 그 정리는 파트너였던 비영리NGO들의 몫이 되버린다.
글. 기업사회공헌연구소 소장